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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번개 복음 간증/심판을 체험한 간증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천 형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형제는 남는 시간에 복음 증거 훈련을 하여 복음 사역에 조금이나마 힘을 바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 성품이 매우 교만했던 기억 때문에 속으로 형제에 대해 선입견과 부정적인 시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전도 대상자가 던지는 질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 일정한 성경 지식도 있어야 하고,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형제는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자 형제는 “제 자질이면 복음 증거 훈련을 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으세요? 복음을 증거하지 않기엔 좀 아깝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짜증이 났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참다운 재능과 지식도 없이 그 본분을 잘할 수 있겠어? 스스로를 너무 높게 생각하는데, 자기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후 천 형제의 상태에 대해 몇몇 형제자매들과 같이 교제를 나누었는데, 자리에 있던 어떤 형제자매들도 천 형제의 교만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자 저는 천 형제에 대한 제 시각이 정확하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 자신이 진리를 구하여 사람을 간파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남을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고, 패거리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에서 저희는 교회 생활 때 하나님 집 영화를 보아도 좋다는 내용의 사역지침을 읽었습니다. 그때 천 형제가 말했습니다. “리더와 일꾼들이 진리 실제가 얼마 없어서 예배 때에도 떠들기만 하고 형제자매들의 실제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이제 예배 시간에 영화를 볼 수 있으니 너무 잘됐어요.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형제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제가 처음에 이 본분을 이행할 때에는 진리 원칙을 몰라서 힘들게 본분을 이행했는데, 이제 원칙을 다 파악하니까 본분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사역 효과도 꽤 괜찮습니다….” 형제의 말은 제게 반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정말 기회주의적이야. 언제 치고 빠져야 하는지를 잘 아는군. 상부 형제님의 교제를 이용해 리더와 일꾼을 헐뜯으면서 자기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네. 정말 교만하기 짝이 없고, 너무 비이성적이야!’ 이어서 다음 예배 시간에 교제할 다섯 가지 주제를 어떻게 배정할지 의논하는데, 천 형제가 혼자서 세 가지 주제를 도맡고, 나머지 두 가지마저 누가 맡을지 자기가 정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조장에게 진행을 맡기자 형제는 곧바로 의심스러운 말투로 조장에게 물었습니다. “되겠어요? 할 수 있으세요?” 그 말은 마치 이번 예배는 진행을 맡을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정말 비이성적이군. 그럼 자기는 된다는 거야? 이번 기회에 형제자매들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려는 생각뿐이잖아. 남들 앞에 나서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만, 내가 기필코 못 하게 만들겠어.’ 형제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도록 저는 기어이 수중의 ‘권력’으로 다시 배정하여 형제를 중심 발언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천 형제의 여러 모습을 떠올리니 염증이 일고, 형제에 대한 선입견도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특히 형제의 교만한 모습에 대해 몇 번 소통했지만, 입으로만 인정할 뿐 시간이 지나도 이렇다 할 변화가 없어서, 이 사람은 보통 교만한 게 아니라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사람은 변화가 불가능하고 구제불능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런 교만한 상태로는 지금의 본분을 이행하는 게 적합하지 않으므로 아예 교체해 버리자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예배 시간에 드러냈던 제 생각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니,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마음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천 형제에게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생각과 커다란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 형제는 너무 교만합니다. 이제는 그 형제가 말하는 것만 들어도 거부감과 반감이 생기고 심지어 교체하고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하나님, 제 영적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어느 방면의 진리에 진입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를 깨우치고 인도해 주소서.’ 기도를 마치고 설교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떠올리면 먼저 그 사람의 결점, 그 사람의 패괴된 면을 떠올립니다. 그게 옳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다른 사람과 정상적으로 지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우선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그 사람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 한 사람의 약점을 잡아 끝까지 물고 늘어진 다음, 그 사람은 인생이 끝장난 사람이라고 치부한다면, 이것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 ‘인류가 이 정도로 패괴되었구나. 이제 끝장이니 구하고 말고 할 것도 없구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 있거나 진리를 추구하기 원합니다. 최소한 자기가 이렇게 추구하면 몇 년 이내에 반드시 변화가 생기고, 결국에는 성품이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께 온전케 되리라고 믿습니다. 다들 이런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이런 믿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 역시 똑같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생명 진입에 관한 설교≫ 중에서) 제 영적 상태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내용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한눈에 파악하고, 다른 사람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는 진리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제 본성이 교만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설교 내용을 통해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형제의 말과 행동에서 늘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는 형제가 나이가 어려서 경망스럽고, 자기를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속으로 형제를 이성이 전혀 없을 정도로 교만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변화할 수 없다고 단정 짓고, 공평하고 공정하게 형제를 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대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는데, 저는 형제가 구원받지 못한다고 늘 단정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저를 드러내심으로써 교만한 제 모습을 똑똑히 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관점을 진리로 생각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너무나 이성이 결여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데 원칙과 기준이 있었습니까? 제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고 단정하는 것이 진리에 맞습니까? 저는 구더기만도 못한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은 사탄에게 패괴되어 패괴 성품을 지닌 사람이지, 빈틈없는 완벽한 사람도 아니요, 진공 속에 사는 사람도 아니다.』(<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진입이다> 중에서) 우리 모두는 아직 온전케 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서서히 변화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설령 본분을 이행하면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거나 과오를 저지르더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발전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뜻과 패괴 성품에 따라 사람을 단정지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교만했습니다. 

 

 기도 [사진제공: 동방번개(전능신교)]

   저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모든 형제자매를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평하게 대해야겠느냐?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소한 문제와 결점, 그리고 자신만의 특성이 있고, 또 독선적인 면, 연약한 면, 부족한 면이 있다. 네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를 도와주고 포용하고 참고 양보해야지, 너무 까다롭게 굴거나 따지려 들어선 안 된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도 있으며, 이제 막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사람, 특별한 요구 사항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네가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진다면, 그것은 까다롭게 구는 것이다.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의 악행은 보지 못하면서, 형제자매들의 사소한 문제나 잘못을 발견하면 도와주기는커녕 크게 문제 삼아 뒤에서 얘기하고 사람들의 반대와 배척, 따돌림을 유도한다면 이는 어떤 행위겠느냐? 개인의 취향대로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사탄의 패괴 성품이자 과오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원칙을 파악하려면 우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결코 알 수 없다. 진리는 너에게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니 진리를 깨달으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하나님 말씀에서 이미 명확하게 제시되거나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사람들 중에는 분량이 작거나 나이가 어린 자도 있고,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자도 있다. 본성과 본질이 나쁘거나 악독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매하거나 자질이 떨어지거나 사회에서 때가 많이 묻어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거나 어리석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지 않고, 사람의 마음만을 본다. 만약 그 사람에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방향이 옳고 그런 목표를 세웠다면, 하나님은 진입할 시간과 기회를 주고 지켜보며 기다린다. 한 번 잘못했다고 단번에 쳐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대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데,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한다면, 그것은 성품이 패괴된 것 아니겠느냐? 그것이 바로 패괴 성품이다. 너는 하나님이 무지몽매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분량이 작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정상적으로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또 악독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대하는 방식을 달리하고,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루는 방식도 달리한다. 너는 이런 방면에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너희는 체험할 줄 알게 된다.』(<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얻으려면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로부터 공과를 배워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대하는 원칙과 방법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적그리스도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미움이고 저주와 징벌입니다. 그러나 분량이 작고 자질이 부족한 사람, 여러 가지 패괴 성품과 결점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기 원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사랑이고, 긍휼이고, 구원입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각 사람을 대할 때는 원칙과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은 포용하고 용서하며, 이들에게 회개하고 변화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패괴 성품을 드러냈다고 단번에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원칙과 방식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천 형제는 평소에 본분에 대해 어느 정도 부담과 책임감도 있고, 실제적인 사역도 좀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저는 형제님이 지니고 있는 이런 장점을 한 번도 직시하지 않았고, 형제의 패괴 성품만을 물고 늘어져,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제 본성은 너무나도 악독합니다! 

   이때, 하나님 말씀이 또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흡사 부모가 자식을 두고 걱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진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대한 지위를 가진 자로 자처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인류에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 그 가죽옷으로 치부를 감추든 추위를 막든 어쨌든 하나님은 직접 손수 그 일을 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생각이나 이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옷을 지어 사람의 몸을 가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에 하나님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실제로 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심지어 사람의 입장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에 대해 막연한 상상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신실함과 낮춤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고 안하무인인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실함과 낮춤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한없이 높이 쳐들었던 머리를 떨구게 되었다.』(<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하나님 말씀은 구구절절 제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따뜻한 관심과 동정, 진실된 보살핌과 걱정이 느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감추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지만, 여전히 그 둘을 긍휼히 여겨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하나님 성품은 너무나 선합니다! 패괴 성품이 있고 과오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의 무지함과 나약함, 유약함을 너그러이 이해하고, 시간과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진리를 공급하여 진입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너무나 진실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과 꾸밈이 없이 참된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깊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습니다. 제가 겪어 온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리더와 일꾼을 조정할 때, 제가 원칙에 들어가지 못해 교회 사역을 방해하였는데도 하나님은 저를 도태시키거나 벌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자매들의 적발을 통해 스스로를 반성하고 회개하고 변화하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제가 의기소침하고 나약해질 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저를 위로하고 붙잡아 주시고, 또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감동시켜 저에게 하나님의 뜻을 교제해 줌으로써 강해지도록 하셨습니다. 또 과오를 저지르거나 사역을 잘못하여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경계 속에 살면서 본분을 게을리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제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깨닫게 함으로써 소극적인 상태와 오해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일찍이 제게 행하신 것 아닙니까? 저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나니, 강퍅하고 무감각한 제 마음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에 의해 점점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을 계속 거역하고 대적했지만, 당신은 사랑으로 저를 용서하시고, 제 나약함을 너그러이 이해하셨습니다. 말씀을 공급하여 저를 깨우치고 붙들어 주시면서 한 발 한 발 이 자리까지 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이토록 심혈을 기울여 구원할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면서 제가 변화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앞으로 당신의 뜻과 요구에 따라 실행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할 수 있기만을 원합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