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보다
예수 하나님의 성품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그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미하고 섬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늘 연약하기도 하고 강인하기도 했으나, 우리의 모든 행동이 주의 가르치심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고,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또 예수의 재림과 그의 영광이 임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땅에서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나라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또한 모든 것이 ‘주님이 오실 때 재난을 가져오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리라. 주를 따르고, 주의 재림을 맞이한 자들은 모두 들림 받아 공중에서 주의 얼굴을 뵈리라’라는 계시록의 예언대로 되기를 고대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다행히 주님의 강림을 볼 수 있는 말세에 태어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박해를 받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얻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 모든 기대와 주님이 주신 은혜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깨어서 기도하고 예배에 더 노력을 기울였다. 어쩌면 내년, 아니면 내일,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더 가까운 시간에 주께서 홀연히 강림하여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는 첫 순위로 주님의 현현을 보고, 들림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남에게 뒤질세라 앞다투었다. 도래할 그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일을 그만뒀고, 어떤 이는 가정을 버렸으며, 어떤 이는 결혼을 포기했고, 심지어 어떤 이는 모든 적금을 바쳤다. 이 얼마나 사심 없는 봉헌인가! 이런 진심과 충성은 역대의 성도들에게도 없었을 것이다. 주님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시나니, 우리의 이러한 봉헌과 헌신을 모두 기억하실 거라고 믿었다. 또한,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상달되었으니, 우리의 봉헌에 대한 상을 내릴 것이라 믿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과 약속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미래를 계획하며 자신의 봉헌과 헌신이 공중에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조건이자 밑천이라고 확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미래의 보좌 위에 앉혀 놓고는, 만국 만민을 다스리거나 권세를 잡고 왕 노릇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예상 범주 안에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보다
우리는 예수와 적대하는 모든 이를 경멸했다. 그들의 결말은 멸망일 것이다. 누가 그들에게 예수가 구세주임을 믿지 말라고 했던가? 물론, 때로는 예수를 본받아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했다.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포용하고 용서해야 했다. 우리의 모든 행실은 성경에 따른 것이었다.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이단이고 사이비라는 신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님은 성경 안에 계시니, 성경을 떠나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며, 이 원칙을 지키면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잡아 주었으며, 예배할 때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에 맞기를, 주님께 열납되기를 바랐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손만 뻗으면 복을 잡을 수 있는데, 뭔들 포기하지 못하겠는가?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눈이 감찰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거름 더미에서 건져 올려진 극소수의 가난한 사람으로 예수를 따르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들림 받는 꿈, 복받는 꿈, 만국을 다스릴 꿈을 꾸고 있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타락은 남김없이 드러났고, 우리의 욕망과 탐욕은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듯이 일어났다. 그 누구도 우리의 기대가 정말 옳은지, 나아가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정확한지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람이 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찾을 방법도, 탐구할 방법도 몰랐으며, 알아볼 생각조차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들림 받을 수 있을지, 축복받을 수 있을지, 천국에 우리의 자리가 있을지, 생명수와 생명나무의 열매가 우리에게 주어질지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것을 위해서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았던가? 우리의 죄는 이미 사함 받았다. 우리는 회개도 했고 쓴잔도 마셨으며 자기 십자가도 졌다. 우리의 대가가 주님께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충분한 기름을 예비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미련한 처녀가 되고 싶지 않았고, 버려둠을 당하는 이가 되고 싶지도 않았기에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게 보호해 달라고 더 자주 기도했다. 성경에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3~24)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이 구절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달달 외웠으며, 그것을 지극히 귀중한 보물로, 생명으로 여겼고, 구원받거나 들림 받을 수 있는 증거로 여겼다.
수천 년간, 살아 있던 사람들은 기대와 꿈을 갖고 떠났지만, 그들이 천국에 갔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은 자는 또다시 돌아왔고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잊은 채, 여전히 옛사람들의 가르침과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이렇게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흘렀지만, 우리의 예수, 우리의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한 모든 것을 열납하셨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저 결과를 기대하며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을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침묵하셨고, 우리에게 나타나신 적도, 말씀을 하신 적도 없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이적을 근거로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자기 멋대로 판단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졌고,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우리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우리의 지식과 관념, 윤리관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대신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 요구하고 하나님을 쥐락펴락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규례를 지키는 데에 익숙해져 성령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데에 익숙해졌다. 우리는 이렇듯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그의 성품이 어떤지, 그의 속성(원문: 所有所是)은 어떻고 형상은 어떤지, 그가 오셨을 때 우리가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인지 등은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그가 있고, 우리가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어떠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좋아하며, 우리의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겼다. 우리는 세상만사를 하찮게 여기고, 만유를 발아래 두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자이기 때문에 천산만수(千山萬水)도, 그 어떤 역경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더라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으며 열두 가지 실과가 열리는데 달마다 열리며 그 나무의 잎은 만민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더라 다시는 저주가 없을 것이라 성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으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고 그의 얼굴을 보며 그의 이름을 이마에 새기리라 더 이상 밤이 없으며 등불이나 햇빛도 필요 없도다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춰 주심이라 그들은 영원토록 왕이 되어 살리라”(계 22:1~5, 중국어성경 직역)라는 노래를 부를 때면 우리의 마음은 무한한 기쁨과 만족으로 넘치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님의 택하심과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게 하시니, 지금 저희의 목숨을 거둔다고 하셔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속히 오소서! 이렇게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는 저희를 봐서, 주님을 위해 모든 걸 버린 저희를 봐서, 한시도 지체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우리 앞에 나타난 적도 없으시지만, 그의 사역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모든 땅을 감찰하시고, 만유를 주관하시며, 사람의 모든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있다. 그는 계획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그의 경륜을 펼치고 계신다. 아주 고요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 인류에게 다가와 손쓸 틈도 없이 빠르게 우주에 그의 심판대를 세웠다. 그에 따라 그의 보좌 또한 우리들 가운데 임하였다. 이 얼마나 위엄 있는 장면인가! 또 얼마나 장엄한 광경인가! 그 영은 비둘기같이, 또 포효하는 사자같이 우리 모든 사람들 가운데 임하셨다. 그는 지혜요, 공의요, 위엄이다. 그는 권능을 지니시고 자비와 긍휼을 가득 안고 조용히 우리들 가운데 강림하셨다. 그의 강림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맞이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가 장차 할 모든 일을 아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사람의 삶은 여상했다. 사람은 평소와 똑같은 마음을 지니고 평소와 똑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님 또한 보통 사람처럼 우리들 가운데서 생활하시면서 가장 작은 자가 되어 따르고 있었고, 평범한 신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목표가 있었으며, 일반인에게는 없는 신성을 지니시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신성을 알아채지 못했으며, 아무도 그의 본질이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지내면서 어떤 구속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눈에 그는 그저 보잘것없는 신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의 눈에 담기고 있었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 또한 그의 앞에 남김없이 드러났다. 아무도 그의 존재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아무도 그가 하는 기능에 어떤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또 아무도 그의 신분에 어떤 의구심조차 품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좇는 바를 계속할 뿐이었다. 마치 그와는 어떤 관계도 없는 듯이….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성령이 그를 ‘통해’ 한 편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했으며, 기쁘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그 말씀을 선포한 사람이 누구든,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거절하지 말고 모두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음의 음성은 나를 통해서, 혹은 너를 통해서, 그것도 아니면 그를 통해서 선포될 수도 있지만 누가 되었든 모두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우리는 그자를 우러러보아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는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우리 또한 절대로 그렇게 평범한 사람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택할 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존귀하신데, 어찌 보잘것없는 사람이 대신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올려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토록 미미한 사람이 어찌 그렇게 중요하고 어려운 임무를 담당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분명 흰 구름을 타고 만인에게 보이실 것인데,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런 주님이 어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조용히 숨어 계실 수 있단 말인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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