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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번개 말세 심판

사탄이 패괴된 인류는 왜서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는가?


왜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는가?



  (하나님 말씀 전편 발췌)


  하나님이 성육신 된 까닭은 그의 역사 대상이 사탄에게 패괴된 육체에 속한 사람이지 결코 사탄의 영이 아니고, 육체에 속하지 않은 어떠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육체가 패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육체에 속한 사람을 그의 역사 대상으로 한 것이다. 더욱이 사람은 패괴된 대상이기 때문에 그가 어느 단계의 구원 사역을 하든지 모두 사람을 택하여 그의 유일한 역사 대상으로 한 것이다. 사람은 속된 인간이고 혈기에 속하며,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데는 더 좋은 역사 효과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람과 같은 속성을 가진 육신이 되어 사역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에 속하고 또한 죄를 이기는 능력과 육체에서 벗어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것도 반드시 육신이 되어 역사해야 한다. 비록 하나님 성육신의 실질과 신분이 사람의 실질, 신분과는 크게 다르지만 그의 외모는 사람과 같다. 그에게 정상 사람의 외모가 있고 정상 인성의 생활이 있어 사람은 그에게서 정상 사람과 다른 점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단지 이 정상 외모와 정상 인성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정상 인성에서 하는 신성의 사역을 할 수 있다. 그의 육신은 그가 정상 인성에서 하는 사역에 이롭고,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사역에 이롭다. 그의 정상 인성은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구원 사역에 더욱 이롭다. 비록 그의 정상 인성이 사람들 속에서 적지 않은 풍파를 일으키겠지만 그런 풍파는 그가 역사하여 달하는 정상 효과에 결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어쨌든, 그가 정상 육신에서 하는 역사는 사람에게 그래도 크게 유익하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상 인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역사는 여전히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게다가 그 효과는 정상 인성에 의해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그가 육신에서 역사하여 사람에게 얻게 하는 것은 사람이 그의 정상 인성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의 십 배, 몇십 배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마지막에 그가 한 사역으로 다 파묻힐 것이다. 사역이 도달한 효과, 즉 그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그에 대한 관념의 양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그가 육신에서 하는 사역은 상상할 수 없고,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육신은 육체에 속한 어떤 사람과도 같은 육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형은 서로 같아도 실질은 전혀 다르다. 그가 육신이었기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수많은 관념이 생기게 되었지만 그의 육신은 사람에게 수많은 인식을 얻게 할 수 있는데, 심지어 그의 육신은 그와 비슷한 외형이 있는 그 어떤 사람이든 정복할 수 있다. 그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외형을 가진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완전히 측량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그를 완전히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추대하고 환영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볼 수 없는 영이기만 하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가 너무 쉬울 것이다. 사람은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형상을 제멋대로 하나 택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삼아 자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시원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은 스스로 그 자신만이 ‘하나님’께 가장 충성하고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은 모두 이방 개이고 모두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막연함과 도리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데, 대동소이하여 별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각 사람이 상상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각기 다를 뿐, 그 실질은 다 같은 것이다.



왜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는가?




  사람은 모두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는데,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이것은 ‘인권 자유’이고,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는 것은 모두 자신의 하나님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의 사유 재산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거의 다 이런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다. 이 재산은 비록 사람이 보기에 상당히 보배롭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오히려 가장 비천하고 무가치한 것들이다. 그것은 사람의 이 사유 재산이 바로 가장 뚜렷하게 하나님과 서로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있는 형상이 있는 육신이 되었는데, 형상이 없는 영이 아니라 사람이 접촉할 수도, 볼 수도 있는 육신이다. 그러나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대다수가 모두 형상이 없으면서도 자유 형상이 있는 비육신인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성육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대다수 사람들의 원수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사람에게 관념이 있는 것은 결코 사람의 사유로 인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패역으로 인한 것도 아니라, 사람의 이 사유 재산으로 인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재산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는데,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고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막연한 하나님을 믿기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지, 결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 때문이 아니고 더욱이 하늘의 하나님 때문도 아니다. 사람 자신이 상상한 ‘하나님’을 믿었기에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이 육신에 온 까닭은 전적으로 패괴된 사람의 필요로 인한 것인데, 사람의 필요이지 하나님의 필요가 아니다. 이 모든 대가와 고통은 다 인류를 위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득실과 보수라는 말이 없다. 그가 얻는 것은 나중에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원래부터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인류를 위해 행한 모든 것과 지불한 모든 대가는 결코 더 많은 보수를 얻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류를 위하여 한 것이다. 육신에서 역사하면 비록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곤란이 있지만, 육신이 역사하여 최종에 도달하는 효과는 그래도 영이 직접 역사하는 효과를 훨씬 뛰어넘는다. 육신이 역사하면 비록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고, 결코 영과 같은 위대한 신분이 있을 수 없고 영과 같은 비범한 행사도 있을 수 없으며, 더욱이 영과 같은 권병(역주: 권세)도 있을 수 없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이 육신이 역사하는 실질은 영이 직접 역사하는 실질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이 육신 자체는 모든 사람의 필요이다. 구원받는 사람에 대해 말하면, 영의 사용가치는 육신의 사용가치보다 훨씬 못하다. 영의 역사는 전 우주에 보급되고 산천 호수에 파급될 수 있으나, 육신의 역사는 그와 접촉하는 각 사람과 더욱 효과적으로 관련될 수 있고, 또한 형체가 있는 육신은 사람의 이해와 신임을 더욱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실제 행사에 대한 인상을 더욱 깊어지게 할 수 있다. 영의 역사는 신묘막측 하여 범속한 사람이 예측하기 어렵고, 보기는 더욱 어려워 다만 근거 없이 상상할 뿐이다. 육신의 역사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또한 풍부한 지혜가 있는데, 범속한 사람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 지혜를 직접 깨달을 수 있어 풍부한 상상을 펼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육신의 하나님이 역사하는 정확성과 실제적 가치이다. 영은 다만 사람들이 보지도 못하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영이 깨우쳐 주거나 감동을 주거나 인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유가 있는 사람을 놓고 말하면, 영의 이런 역사는 결코 사람에게 명확한 뜻을 줄 수 없고, 감동이나 대체적으로 비슷한 뜻만 줄 뿐이지 결코 말로 지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역사는 이와 크게 다르다. 육신이 역사하면 정확한 말씀의 인도가 있고, 명확한 뜻이 있고 명확한 요구 목표도 있으므로 사람이 모색할 필요도, 상상할 필요도, 더욱이 추측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육신이 역사하는 명확성인데, 영의 역사와 크게 다르다. 영의 역사는 일부 유한한 범위에만 적합할 뿐, 결코 육신의 역사를 대체할 수 없다. 육신이 역사하여 사람에게 정확한 목표를 요구하고 또 사람이 인식을 얻는 그 실제 가치는 영이 역사하는 정확성과 실제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패괴된 사람에게는 오직 정확한 말씀, 명확한 추구 목표,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역사만이 가장 가치 있는 역사이다. 오직 현실적인 역사와 시기 적절한 인도만이 사람의 취향에 맞고, 오직 실제적인 역사만이 사람을 패괴되고 타락된 성정에서 구원해 낼 수 있다. 이런 것은 오직 성육신 하나님만이 도달할 수 있고, 오직 성육신 하나님만이 사람을 패괴되고 타락된 옛 성정에서 구원해 낼 수 있다. 영은 비록 하나님의 고유한 실질이지만, 이런 사역은 오직 육신으로만 할 수 있다. 영만 단독으로 역사한다면 역사 효과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비록 이 육신으로 인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지라도 이 육신이 그의 사역을 다 마칠 때에는 그와 적대되던 그 사람들이 더 이상 그의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증인이 되는데, 그에게 정복된 증인이 되고, 그와 합하고 그와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증인이 된다. 그는 사람에게 육신이 하는 사역의 중요성을 알게 할 것인데,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는 의의에 대한 이 육신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고, 사람의 생명이 진보하는 데에 대한 이 육신의 실제 가치도 알게 될 것이며, 더욱이 이 육신은 사람이 떠날 수가 없는 생명의 샘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비록 그의 신분, 지위와 크게 다르고, 사람이 보기에 그의 실제 신분(원문: 身價)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하나님의 고유한 형상을 지니지 않고 고유한 신분이 없는 이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직접 하지 못하는 사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육신 된 고유한 의의와 가치인데, 이 의의와 가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영에 대해 우러러보는 태도를 취하고, 하나님의 육신에 대해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할지라도 사람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여기든 육신의 실제 의의와 실제 가치는 영의 실제 의의와 실제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물론 이것은 패괴된 인류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다.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간절히 사모하는 각 사람에 대해 말하면, 영의 역사는 사람에게 감동이나 묵시만 줄 뿐이고, 기묘막측(奇妙莫測) 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신기한 느낌만 줄 뿐이며, 위대하고 비범하고 사람이 모두 앙모하면서도 도달하지 못하고 닿지 못하는 느낌만 줄 뿐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영은 아득히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 마치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영원히 서로 같을 수 없는 듯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는 듯하다. 사실상, 이것은 영이 사람에게 주는 착각일 뿐이다. 이 착각은 다만 영과 사람이 동류가 아니고, 영과 사람이 영원히 한 세계에서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 영은 사람이 갖추고 있는 어떤 것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 말하면, 영은 사람의 필요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영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역을 직접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의 역사는 사람에게 실제적인 추구 목표를 주고, 명확한 말씀을 주며,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느낌을 주고, ‘보잘것없고’ ‘평범한’ 느낌을 준다. 사람이 비록 두렵다고 느끼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래도 상당히 접촉하기 쉬운 것이다. 사람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므로 아득히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육신은 사람에게 아득히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주고,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이 육신은 사람과 같은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더보기